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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1월 4일자 세저리 뉴스
- 조형진
- 조회 : 3391
- 등록일 : 2010-01-04
아침부터 많은 눈이 왔다.
치과를 가야 했다.
근처 강남 쪽은 비용이 많이 나와 익숙한 대학로 쪽으로 향했다.
발목까지 덮이는 눈.
지하철 타는 곳까지 걷기에는 엄두가 안 났다.
버스를 탔다.
청담동 오르막길 앞에서 버스 바퀴는 시계 초침보다 느리게 돌아갔다.
일이나 성미가 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버스에서 내렸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 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
멈춰 서 있는 버스 창문을 신의 창으로 삼아 눈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퍼머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
엉덩방아를 찧고서도 벌떡 일어서는 아저씨,
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미끄러운 거리를 총총 걷는 보법을 선보이는 아가씨.
아주머니의 머리에 보이는 몇 올의 흰머리가닥,
아저씨가 넘어질 때도 아저씨 손에 붙들려 있던 서류가방,
총총걸음을 걸으면서도 유난히 조심스럽게 들고있는 아가씨의 새빨간 핸드백.
그것들에는 어떤 이야기와 사연이 담겨 있을까. 이런 저런 망상을 끌어와 퍼즐을 맞춰본다.
1분이면 지날 거리를 1시간이 지나도 통과를 못하자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한가로움이 빈둥거림으로 바뀐다.
따분해지자 손에 휴대폰을 들고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것도 지겨워져 버스에서 내린다.
청담동 명품거리를 지나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명품점 직원들이 점포 앞 눈을 치우고 있다.
다들 점퍼를 입었는데 까르띠에 직원들만 정장에 손질된 머리를 하고 눈을 치운다.
"이런 날 어떤 손님이 올려나"
이렇게 뱉는 직원의 말이 "이런 날은 손님도 안 올 것 같은데 눈 치워야 하나"로 들린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난다.
"근처에서 아이들 미끄럼 타는 소리"라고 눈 치우는 사람들이 말한다.
자동차들이 열심히 헛바퀴질을 하며 오르려 하는 길이 아이들에게는 미끄럼틀이 되었나보다.
오늘 아침 KBS<아침마당>에서 주철환 교수가 했던 "매순간 돈보다 추억을 만들라"는 말이 떠오른다.
상점 직원들은 오지도 않을 손님때문에 눈을 치우고, 자동차들은 열심히 헛바퀴질을 하며 돈을 만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느린 오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