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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1월 4일자 세저리 뉴스

  • 조형진
  • 조회 : 3391
  • 등록일 : 2010-01-04
P100104002.jpg ( 549 kb)

아침부터 많은 눈이 왔다. 
치과를 가야 했다.
근처 강남 쪽은 비용이 많이 나와 익숙한 대학로 쪽으로 향했다.
발목까지 덮이는 눈.
지하철 타는 곳까지 걷기에는 엄두가 안 났다.
버스를 탔다.
청담동 오르막길 앞에서 버스 바퀴는 시계 초침보다 느리게 돌아갔다.
일이나 성미가 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버스에서 내렸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책을 꺼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 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

멈춰 서 있는 버스 창문을 신의 창으로 삼아 눈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퍼머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
엉덩방아를 찧고서도 벌떡 일어서는 아저씨,
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미끄러운 거리를 총총 걷는 보법을 선보이는 아가씨.

아주머니의 머리에 보이는 몇 올의 흰머리가닥,
아저씨가 넘어질 때도 아저씨 손에 붙들려 있던 서류가방,
총총걸음을 걸으면서도 유난히 조심스럽게 들고있는 아가씨의 새빨간 핸드백.

그것들에는 어떤 이야기와 사연이 담겨 있을까. 이런 저런 망상을 끌어와 퍼즐을 맞춰본다.

1분이면 지날 거리를 1시간이 지나도 통과를 못하자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한가로움이 빈둥거림으로 바뀐다.
따분해지자 손에 휴대폰을 들고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것도 지겨워져 버스에서 내린다.

청담동 명품거리를 지나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명품점 직원들이 점포 앞 눈을 치우고 있다.
다들 점퍼를 입었는데 까르띠에 직원들만 정장에 손질된 머리를 하고 눈을 치운다.
"이런 날 어떤 손님이 올려나"
이렇게 뱉는 직원의 말이 "이런 날은 손님도 안 올 것 같은데 눈 치워야 하나"로 들린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난다.
"근처에서 아이들 미끄럼 타는 소리"라고 눈 치우는 사람들이 말한다.
자동차들이 열심히 헛바퀴질을 하며 오르려 하는 길이 아이들에게는 미끄럼틀이 되었나보다.
오늘 아침 KBS<아침마당>에서 주철환 교수가 했던 "매순간 돈보다 추억을 만들라"는 말이 떠오른다.
상점 직원들은 오지도 않을 손님때문에 눈을 치우고, 자동차들은 열심히 헛바퀴질을 하며 돈을 만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느린 오늘 아침이었다.

제목아이콘이미지  댓글수 16
admin teal   2010-01-04 20:00:57
나도 수능 끝나고(-_-;;) 저 책 사서 읽었었는데 +_+
조 피디님의 냄새(?) 가 풀풀 풍기는 세지리 뉴스네용ㅎㅎ

오늘 정말 30cm 쌓인 눈,
계단인지 경사진 길인지 구분할 수 없었어요.
내일 제천 가야 하는데.. 쿨럭.......
admin 터치   2010-01-04 22:20:31
참, 내일은 만수가 세저리 뉴스 씁니다.
admin 동네 노는오빠   2010-01-04 22:36:23
오..뭔가 멋진 세저리뉴스다...(먼 산)
admin 페릿   2010-01-04 23:24:57
오늘 제천에 기차 타고 왔어요. 처음으로. 설경이 너무 멋져 여행가는 기분이었어요. 을 읽었는데 차디 찬 겨울에 사람들로 북적대는 기차 안에서 읽으니 묘한 맛이 있더군요. 기차로 제천 컴백 강추!
admin 호랑   2010-01-05 09:39:07
눈, 그만와라.
admin 최원석   2010-01-05 16:23:07
대학로 근처 도넛 가게군요! 돈 보다는 추억. 형진형의 세저리뉴스를 읽으니 저도 아이들만큼 한가롭게, 하지만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9층에 있는 회사에(현재 인턴쉽 중)가는데, 21,23,25,27층들에 멈춰서며 느릿느릿 올라가는 공간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단시 회사에 오고 가기 위해 보내는 의미없는 시간,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시간 등을 어림잡아 하루에 2-3시간이라면, 그런 시간과 순간들 속에서도 무언가 발견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은 언론인과 예술인 정도 밖에 없겠다고요. "회사에 가는 시간"대신 "사람들에게 전할, 세상 속의 취재거리를 찾는 시간"으로 보낸다면, (물론 24시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겠지만) 매일 매일 곽찬 하루를 쌓아올린다는 생각이 들듯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언론인은 매 순간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세상에 몇 안되는 멋진 직업이 아닐까요.
-눈 없는 나라에서, 한국에 계신 많은 사람들 얼굴을 떠올리며 소회를 남깁니다.
지난 여름 제천의 조용했던 밤이 문득 그립네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dmin 제쌤   2010-01-05 19:33:47
형진이에게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구나......
admin 형진   2010-01-05 21:58:46
앗,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admin 필리피노   2010-01-05 22:02:24
나도 눈 없는 나라에서 한동안 있었는데, 반가워 ㅋ
admin 비밀번호   2010-01-05 22:03:29
우리는 많은 걸 압축한 제쌤의 말줄임표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ㅋㅋㅋ
admin 황금광   2010-01-05 22:07:04
앗, 미안. 황색정론지 세저리 뉴스인데... 다음에는 격에 맞춰 쓸게 ㅎ
admin 소냐   2010-01-05 22:09:25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연민을 느끼시나요?
admin 정답   2010-01-06 00:07:04
ㅋㅋㅋㅋㅋ 쪼큼 동감
admin 우왕   2010-01-06 10:26:49
낭만적인 "구석"이라고 하셨음ㅋㅋㅋ
admin b+급남자   2010-01-06 13:55:22
와우 역시 낭만파 형진 ㅎㅎㅎ 특히 여자한테 잘해요
admin zinc   2010-01-06 15:37:16
언제 B에서 B+로 승격 하셨나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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