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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일상을 기록하는 당신이 아름답다 - 서울대교수, 화가 김병종 화백 나의 논픽션 中
- 이동현
- 조회 : 6659
- 등록일 : 2008-05-17
어제 특강을 듣다 든 생각. 일상, 그리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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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나의 어머니께서는 " 내 얘기를 소설로 쓰면 책이 몇 권" 이라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만큼 그 겪어온 세월이 파란만장했다는 얘기인데, 아닌게 아니라 대충 한귀로 흘려들어도 소설은 저리가라 할 대목들이 많았다.
비단 내 어머니만이 아니라 주위에는 어린 내 눈에도 참으로 굴곡진 삶의 무늬를 가진 분들이 많았다. 집안 대소서 때면 그들이 둘러앉아 밤늦도록 두런두런 살아온 기억들을 나누는 걸 이불 속에 누워 듣곤 했다. 듣다보면 다가올 생에 대한 두려움이 왈칵 들어, 졸음은 멀리 달아나버린 채 잔망스러운 한숨을 몰래 내쉬곤 했다.
그 아프고도 지긋지긋한, 내 잠속에서 종종 악몽으로까지 재현되는 쓰라린 삶은, 그러나 그 구술자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면서 늘 새로운 형식으로 재구성되곤 했다. 어린 가슴을 옥죄게 하던 그 무섭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어느새 판소리 열두마당은 저리가라며 다채롭게 펼쳐졌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쪽이나 듣는 편이나 모두 장탄식과 눈물바람이 이어졌다. 잠든척 하며 이불 속에 숨죽이고 있던 나 역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쳐야 할 때도 있었다.
세상은 그 지점으로부터 참 멀리도 왔다. 숨소리와 땀내를 맡으며 개인적 삶의 진술을 들어본 적이, 참 아득하다. 침을 꼴까 삼키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초롱한 눈빛 대신 에이리언의 안광처럼 푸르스름한 컴퓨터 화면을 마주한 채, 그 익명성 속에서만 속내를 토로하는 게 피차 편한 세상이 되었다.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혹은 비리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만이 우리의 눈과 귀를 유혹한다. 가식 따위 날려버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사람들은 유혹되지만 그 자체가 아주 "리얼"한 픽션일 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니터가 꺼지는 순간 그것들이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동시에 사라지는 건 거기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어느 곳으로 떠나든 길을 나설때면 나는 스케치북과 함께 노트를 챙긴다. 노트북 컴퓨터 말고 공책말이다. 흰 종이 위로 사각사각 연필을 달려 타인의 삶과 풍경들을 적어내려 가다보면 사물들이 생각을 불러낸다. 그리고 생각은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다. 참 이상하다. 눈으로 쓱 훑어볼 땐 그냥 스쳐 지나는 풍경이었던 사람이, 보랏빛 구름 한 조각이, 폐허의 유적지가, 글로 적다보면 존재성을 획득하며 자기 얘기를 스스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적 백일장 떄, 뙤약볕 내려쬐는 운동장 구석에서 원고지 칸을 하나씩 메우다보면, 나도 옆자리 친구도 뜨거운 태양도 사라지고 그 이야기 속으로 스윽 빨려 들어가버리던 그 때처럼.
시대는 달려져도 누군가 온 몸으로 새기고 싶은 이야기는 늘 존재한다. 논픽션이란 게 따지고 보면 나 어릴 적 어른들 틈에 끼어 듣던 그 다채로운 빛깔과 문양의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다. 특별한 체험이어도 좋고, 모두 아록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도 괜찮다. 세상을 뒤흔든 사건만이 기록될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 트렌드의 시대라 했던가. 작고 사소한 외형 속에 우주적인 울림을 간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아재와 숙모들의 이야기는 등잔불과 함께 타오르다 이내 스러져버렸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손가락으로 바위에 글을 새기듯 쓴다. 고 했지만 글쓰기가 업이 아닌 사람들은 어쩌면 온몸으로 파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기록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제 안에 단단히 뭉쳐있는, 바로 그것을 기록으루 복원하는 순간 당신은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 서울대교수, 화가 김병종 화백 "나의 논픽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