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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진보언론은 왜 공격받는가
- 관리자
- 조회 : 32325
- 등록일 : 2017-05-24
진보언론은 왜 공격받는가? 갑론을박이 한창이지만 진단도 처방도 표피적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언론의 위기는 "페이스북 갑질"이나 "무례한 호칭" 같은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오랜 기간 유래했기 때문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언론은 촛불혁명의 한 주역이면서도 일부 정치부 기자와 논객들이 야당이긴 하지만 보수성향인 대통령 후보를 호의적으로 보도하는 등 혼란스런 정체성을 드러냈다.
세계 일류 진보언론이 그렇듯이 가치 중심의 보도는 진보언론의 생존조건이다. 양쪽 눈치를 보는 논조로는 살아남을 수 없고 "헬조선"을 바꾸는 데도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는 책을 썼다. <녹색평론>에 서평이 실렸는데, 상당 부분은 책 내용을 비판한 거지만, 김종철 발행인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옮겨 싣는다.(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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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보언론, 그 이상과 현실
[녹색평론 서평] 이봉수 지음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
김종목(경향신문 기자)
“잘 나가는 레이싱 모델女 연봉이 얼마길래”, “아내가 다른 남자와 키스할 때마다”, “명절에 친정 찾은 처제 성추행한 나쁜 형부”, “45세 미나, 수준급 폴댄스 ‘엄지 척’”, “클라라 역대급 글래머”…. 4월 13일 현재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종합지와 경제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28개월 전 온라인 일을 맡고나서 매일 출근하면 네이버 스탠드를 훑는다. 언론사들이 직접 뉴스를 편집하는 이 공간에선 종합지와 경제지를 구분하기 힘들다. 오랜 역사의 한국 영자지마저 악어와 사자의 싸움을 머리기사로 올리곤 한다. ‘트래픽’으로 언론사 각각의 정체성·경계가 무너진다.
더 교묘하고 선정적인 건 정치·경제·사회 영역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 <경향신문>과 <한겨레>, JTBC와 TV조선 등 여러 언론사의 실증 탐사보도는 언론사에 기록할 성과였다. 언론 전반으로 확대하면 긍정의 권력 감시·비판 보도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 최순실과 고영태가 내연 관계인지를 따지는 기사들이 시민이 알아야 할 보도를 곧 압도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실은 특히 온라인에서 되풀이된다.
시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보도는 박근혜 구속 이후에도, 조기 대선 국면에도 이어진다. 최근 온라인 혁신에 들어갔다는, 한국 최고 신문을 자부하는 한 언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매일 듣는 노래’라는 제목의 기사를 온라인에 실었다. 박근혜가 따로 드라마 주제곡이라도 듣는 특권을 누린다는 걸까? 아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이후, 다른 수용자와 동일하게 매일 아침마다 ‘구치소 기상송’인 ‘지킬수록 기분 좋은 기본’을 듣고 있다고 알려졌다”는 읽으나 마나 한 허무한 내용의 기사다. 종이신문에 결코 싣지 않을 기사들을 온라인엔 거리낌 없이 올린다.
이봉수(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원장)는 <경향신문> 2014년 8월 8일자 “[이봉수의 미디어 속 이야기] 세계언론사에 남을 추악한 특종과 선정보도”에서 한국 언론의 선정 보도 행태를 비판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언론이 선정보도와 왜곡보도로 명맥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사회 공공의 도구로서 생명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 글은 지난 1월 나온 <중립에 기어를 넣고는 달릴 수 없다>(이음)에도 실렸다. 책은 2008~2014년 이봉수가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시민편집인으로 일하며 쓴 칼럼을 모았다. 나는 정치경제사회 평론을 겸한 이봉수의 미디어비평을 즐겨 읽던 독자였다. 이 서평을 쓰려고 다시 읽어보니 앞서 선정보도 지적처럼 지금도 유효한 비판과 제언이 많다. 요즘 말로 하면 한국 언론의 ‘흑역사’를 다룬 이봉수의 비평 이후에도 한국 언론의 고질은 변함없거나 되레 악화됐다.
책 부제는 ‘진보언론연구’다. 한국 언론 전반을 다루면서도 <경향신문>과 <한겨레> 보도를 대상으로 한 비평이 많아서다. “신문에 나갔으면 됐지, 뭘 또 책으로 내느냐”는 계면쩍음 때문인지 이봉수는 “양심상 새로 몇 편의 긴 글”을 썼다. 1장 ‘한겨레는 왜 가디언이 못 되나’가 그 몇 편의 글 중 하나다. 책 출간 즈음 이봉수는 한겨레 사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책은 출사표로도 읽힌다. ‘한겨레’에 ‘경향신문’이나 다른 ‘진보언론’을 대입해 읽어도 좋은 장이다.
이봉수는 <조선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언론인이다. 마흔일곱의 나이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로 유학 가 6년간 공부했다. 책엔 <가디언>, <인디펜던트>, BBC 같은 영국 정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중 <가디언>이 대표적이다. <가디언>은 어떤 언론인가? 이봉수가 책 곳곳에 적은 <가디언>은 “자국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대체로 노동당을 지지하지만 블레어 정권이 우경화할 때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고, 캐머런의 보수당이 감세정책을 포기하고 의료복지체계를 확충하겠다고 하자 지지를 하고 나”선 가치 중심의 논조를 견지한 신문이다. “세계적인 오피니언 리더답게 2016년 말 현재 236명의 칼럼니스트를 확보하고 있는데 대개 언론계에서 성장해 내로라하는 전문가가 된 이들”이 모인 곳이다. “오피니언면에서 독자의견도 소중히 여기”는 매체다.
“정치가 미디어 영역 안에 존재하게 된 점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미디어면 확대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려” 한 신문이다. “일찌감치 2006년에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 한 미디어다. “신문 온라인판에서 선정성을 찾아내기 힘”든 정론이다. 이 신문은 “양면 또는 전면에 자주 초대형 그래픽을 넣어 인상적으로 담론활동”을 한다. “부수를 늘리기 위해 모든 독자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목표 독자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곳이다.
논조부터 그래픽, 목표 설정까지 나무랄 데 없는 언론이다. 이봉수는 칼럼집에서 왜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비슷한 발행부수의 진보신문 <가디언>처럼 “주류도 탐독하는 매체가 되어 자국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지 못하는가를 꾸짖듯 분석한다. 그는 정치·선거·경제·환경 보도, 언어의 공공성 등 저널리즘 표준을 벗어난 보도를 아프게 지적한다.
이봉수의 신랄한 미디어비평은 배울 게 많다. 앞서 예로 든 ‘세계언론사에 남을 추악한 특종과 선정보도’에서 이봉수는 “(경향신문 온라인판은) 지난달 27일에는 ‘호위무사 박00, 결혼 전 유대균 옆에서…’라는 선정적 제목의 머리기사를 온종일 걸어두었다”고도 적었다. 2007년 9월 16일 <변양균·신정아 ‘입’ 맞췄나>라는 <경향신문> 온라인판 머리기사도 예로 들었다. 이 칼럼을 다시 읽으며 당시 낯 뜨거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경향신문> 노조 기구인 독립언론실천위원회와 편집국은 이런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개선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2015년 1월 온라인을 담당하는 모바일팀 팀장으로 오면서 이봉수가 같은 글에서 고언한 “온라인판은 ‘신문의 미래’라고들 하는데 종이신문을 위해서도 잠재독자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겨야 한다”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신랄하며 정곡을 찌른 비판을 두고 <경향신문> 편집국은 성찰했다. 구성원 의지로 남부끄러운 온라인 편집은 사라졌다. 취재진들이 팩트를 가리거나 공을 들인 기사 위주로 편집하며 온라인에서도 정론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이봉수의 비평은 지금도 언론 노동자들이 꼭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아직 ‘가디언’이 되지 못한 한국 진보언론의 종사자로서 뭔가 허전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이봉수가 내놓은 혁신 사례를 읽다보면 내키지 않거나 갸웃하는 구석도 있다. 그것도 <가디언>에서 비롯된다. 주로 혁신과 대안에 관한 부분 즉 녹록지 않은 현실 문제다.
이봉수는 “<가디언> 편집국장 러스브리저는 일찌감치 2006년에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하고 2009년 1백 명을 감원할 때도 디지털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 위주로 정리해고 했다”고 적었다. <가디언>의 정리해고 사례를 책 두 군데서 인용했다. 이봉수가 한국 진보언론이 혁신하려면 꼭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취지로 적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혁신(革新)-가죽을 벗기는 고통의 길’이라고 쓴 걸 보면 정리해고도 불가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댓글로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