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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MBC 경제매거진] 흔들리는 거인의 초상
- 관리자
- 조회 : 3977
- 등록일 : 2009-04-01
MBC경제매거진 4월호
흔들리는 거인의 초상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인 새크라멘토의 아메리칸 강 둔치에 등장한 대규모 ‘텐트촌’을 조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이었지만, 이젠 직장과 집을 잃고 캠핑용 천막에서 간신히 밤이슬을 피하게 된 사람들의 절망과 한숨이 방송 화면을 채웠다. 유난히 얼굴 주름이 깊게 팬 한 백인여성은 “나이 50에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지역은 치안과 보건의 사각지대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모여드는 사람의 수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고 한다.
사실상 ‘난민캠프’라고 할 이런 천막촌들이 잇따라 생겨나고, 곳곳에서 주인 잃은 건물과 집들이 거리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경제위기 한 복판에 있는 미국의 맨얼굴이다. 미국의 ‘굴욕’은 국제무대에서도 목격된다. 미국의 최대 채권자인 중국이 ‘미 재무부 채권을 안심하고 계속 사도 좋을까’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짐짓 보이고 있는 것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이렇게 나오자 애가 탄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국채는 절대 안전하다”며 계속 사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금융구제와 경기 부양 등을 위해 앞으로도 엄청난 외채를 끌어다 써야하는 미국으로선 중국이 등을 돌리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왜 이런 신세가 됐을까. 지금 미국인들의 분노는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면 모두가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설파했던 위정자들과 자본가들, 특히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에게 쏠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념을 내세워 시장의 자유와 규제완화, 감세를 주장해 온 그들이 결국 부동산 거품과 금융 위험을 풍선처럼 부풀려서 오늘의 파국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1700억 달러(약 240조원)가 넘는 구제금융을 받아 쓴 보험사 AIG가 임직원들에게 1억6천5백만 달러(약 2300억원)의 보너스를 나눠주는 등 월가의 ‘양심 불량’이 도를 넘은 것으로 나타나자 미국인들의 증오는 폭발하고 있다. 보너스잔치를 벌인 AIG 임직원들에게 살해 협박 등을 담은 이메일과 전화가 쇄도하는가 하면, 이런 사태를 막지 못한 재무장관 등에 대한 퇴진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제트기에 올라탄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자신들의 직장과 집과 행복을 앗아 갔다며, 이들에 대한 응징과 규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이 후회하고 유럽도 반성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우리의 이명박 정부만 유독 흔들림 없이 고집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와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등 부자들의 세금을 대대적으로 깎아주고, 금융위험을 더 확산시키게 될 금산분리완화를 추진하고, 비정규직을 대책 없이 늘리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행한다. 공공 의료체제의 붕괴로 미국인들이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 지 뻔히 보면서도 의료민영화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두렵다. 새크라멘토 같은 천막촌이 한강변을 뒤덮어야 정신을 차리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