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불길하다. 환율은 치솟고, 주가는 폭락하고 있다.
은행들은 해외에서 달러를 빌리기 어려워 진땀을 흘리고, 정부가 온갖 대책을 내놓지만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외신에서 "한국이 위험하다"는
경고가 잇달아 나오고, 정부는 발끈해서 정정 보도를 요청한다. 국제통화기금(IMF) 고위관계자가 "한국 경제는 튼튼하다"고 편을 들어주지만,
시장에서는 "IMF는 늘 그렇게 말하지"하고 평가절하한다. 경상수지 적자와 둔화되는 성장률, 금융권 대출의 대규모 부실화 조짐이 비관론에 힘을
실어준다.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넉넉하다"고 장담하지만, 상황이 더 악화되면 결국 둑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확히 11년 전에도 이랬다. 정부가 보유고를 쏟아부어가며 방어에 나섰지만, 원·달러 환율은 치솟았고, 주가는 폭락했다. 은행들은
해외의 "크레디트 라인"이 끊기고, 달러 대출의 만기 연장이 안돼 벼랑으로 몰렸다. 외신은 "한국이 위험하다. 탈출하라"고 타전했고, 우리
정부는 "엉터리 보도"라며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IMF 총재까지 나서서 "한국경제의 펀더멘털(기본)은 튼튼하다"고 지원사격을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정부는 "외환보유고가 충분해 지급불능 위기는 절대 닥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쓸 수 있는 외환은 알려진 것의 몇
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굴욕적인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혹독한 겨울을 맞이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도
있다. 11년 전에는 우리 내부의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 터졌다. 무분별한 차입 경영으로 부채 비율이 400~500%씩이나 되는 재벌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단기부채를 엄청나게 조달해서 장기로 대출해 주었던 금융회사들은 인도네시아 등의 위기에 놀란 선진국 채권자들이 돈줄을
죄자 단박에 호흡곤란상황에 몰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융위기가 선진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우리 경제는 오히려 재벌들의 부채비율이 100%
안쪽으로 줄어드는 등 11년 전에 비해 훨씬 건실해진 측면이 있다. 외환보유고는 당시의 10배 수준이다. 그렇다면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것일까.
꼭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11년 전엔 형편이 좋은 선진국들이 구원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 코가 석자다. 지금 우리 주식과
외환시장이 요동을 치는 이유 중 하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진국 투자자들이 국내 주식을 팔고 달러로 바꿔 돈을 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11년 전의 악몽을 꼼짝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까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전문가들이 현재로선 더 많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대응을 잘못한다면? 이 대목에서 불길한 느낌이 증폭된다. 11년 전
환란을 부른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외치며 금융시장을 활짝 열어 젖혔다. 당시 일부에서 "급격한 금융개방은 외환위기를 부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는데도 무시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선진화"를 내세우며 민영화, 감세, 규제완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서구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금융위기가 규제받지 않는 파생상품의 무한 팽창, 헤지펀드와 투자은행의 무차별 차입투자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이런
것들을 활성화하는 내용의 규제완화를 추진 중이다. 무리한 외환시장 개입 등으로 시장의 믿음을 잃은 현 경제팀의 사령탑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은
11년 전 우리 경제를 IMF로 몰고 간 바로 그 재정경제원의 차관이었다. 이런 정부가 과연 격랑을 헤치고 "한국경제호"를 안전한 부두로 이끌
수 있을까.
"7%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성장주의 목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정부, 밑천이 다
드러난 신자유주의를 아직도 맹신하는 정부, 시장이 믿지 않는 경제팀을 굳이 붙잡고 있는 정부로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MB정부의 747은
주가지수 747이었더란 말이냐"고 울부짖는 개미투자자들에게, 혹독한 겨울을 걱정하는 서민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답을 주어야 한다. 그 답은
무엇보다 실패한 경제팀을 실패한 정책과 함께 미련 없이 물갈이하고, 위기대응 리더십을 정비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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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국제신문] 시론/11년전의 악몽
- 관리자
- 조회 : 4369
- 등록일 : 2008-10-28
[시론] 11년 전의 악몽 /제정임 경제팀 쇄신 우선되어야 국민 신뢰 되찾을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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