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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시사IN]기자 스스로 ‘직필’ 지켜야 한다
- 관리자
- 조회 : 4516
- 등록일 : 2008-09-12
기자 스스로 ‘직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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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 세명대학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은 ‘해외 독립언론의 흥망사’ 발제에서 해외 유수 언론이 정치·자본권력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했고 지배당했는지, 뉴스룸과 기자의 독립 조건은 무엇인지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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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언론의 자유와 책임의 상관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무한한 자유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은 이 접점을 파고들어 언론을 길들이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적인 신문이 등장한 지 200년이 넘었지만, 최근세를 빼면 언론의 독립은 주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치권력은 법과 제도, 사회통념이나 미풍양속 등을 언론의 책임을 묻는 잣대로 삼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 권력이 독재적일 때는 소수가 다수 의견을, 민주적일 때는 다수가 소수 의견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주필로도 활약했던 J. S. 밀은 <자유론>에서 “한 사람의 반대자도 입 다물게 하는 것은 독재자가 모두를 침묵하게 하는 것과 같다”라고 썼다. 개인 의견이 진실일지라도 토론되지 않으면 독단으로 흐를 수 있고, 그것이 허위라면 그 정체가 쉽게 드러난다는 신념을 깔고 있다. BBC가 이라크 전쟁 보도를 둘러싸고 토니 블레어 정부와 대립하다가 그렉 다이크 사장이 물러난 것에는 비록 ‘가벼운 오보’일지라도 ‘무거운 책임’을 묻는 일류 언론의 전통이 배어 있다. 지금의 <PD수첩> 사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장 경질 직후의 여론조사 결과는 사장을 밀어낸 블레어 정부에 오히려 가혹한 심판을 내렸다. 영국 국민은 정부의 개입이 언론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최근 한국 언론을 둘러싼 사태 전개는 자유주의 언론사상과 선진국 일류 언론의 정부-언론 관계에 비추어 바른길을 크게 벗어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횡포, 신문·방송의 두드러진 정파성과 무책임한 과장 보도 등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견지하기 위해서도 분명히 근절돼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개입은 자율조절 기능의 활성화를 막고, 자칫 정권의 언론 장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금기로 여겨야 한다. 소유 자본의 독립 한국에서는 아직도 타임스를 대단한 권위지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영국에서는 옛날 얘기다. 루퍼트 머독에게 인수된 뒤 노조 와해 정책으로 유능한 기자가 상당수 쫓겨나거나 이직했다. 그 기자들이 주축이 돼 창간한 신문이 인디펜던트이다. 타임스와 인디펜던트는 신문자본의 성격이 신문의 논조와 질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좌우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타임스는 1785년에 창간돼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문 중 하나이고 ‘천둥소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울림이 큰 신문이었지만, 영국에서조차 예전의 권위를 상실했다. 인디펜던트는 중도 성향의 잘 교육받은 독자층을 겨냥해 정치 중립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지면 전략을 구사한다. 특히 반전, 지구온난화, 이민 문제 등 국제 이슈에 강점을 보여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가디언은 스콧 재단의 독특한 소유구조 속에서 진보 성향의 논조를 견지할 수 있었다. 상속자였던 러셀 스콧은 진보 신문이 신문 재벌의 수중에 떨어지면 논조가 변할 것을 염려해 재단에 모든 재산을 기부한 뒤 완전히 손을 떼어버렸다. 2005년 베를린어 판으로 지면을 혁신하면서 세계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으며, 영국의 진보진영을 넘어 영국과 세계의 여론을 주도하는 신문 중 하나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프랑스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은 진보지의 운명을 보여주는 사례다. 68 학생혁명의 선전지에 뿌리를 뒀지만 극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소유가 됐다. 프랑스의 중도좌파 또는 좌파 신문이 재벌의 자본 참여로 명맥을 유지하게 됨에 따라 프랑스 신문업계와 공론장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현저히 오른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유럽보다 신문방송 산업에 대한 진출입 규제가 느슨해 세계적인 미디어 재벌의 기업 사냥터가 되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머독은 미국인이 아니면 방송사를 인수할 수 없는 방송법을 우회하기 위해 국적까지 바꾼 뒤 폭스 방송 등을 인수·설립한 데 이어 지난해 월스트리트 저널까지 인수했다. 머독은 편집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기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립서비스로 보는 게 온당할 것이다. 그는 1981년 타임스를 인수할 때도 비슷한 약속을 했다. 그는 편집에 직접 간섭하지 않고도 논조를 바꾸는 간단한 방법을 알았다. 편집·보도국장 한 명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때 전세계에 퍼져 있는 매독 영향력 아래 놓인 백수십 개 계열사 네트워크 가운데 한 곳도 반전 논조를 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탐사보도 기자인 존 필저는 지난해 “세계 주요 언론은 5개 정도 미디어그룹에 의해 장악되고 있으며, 독립언론은 극히 예외적인 존재가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루퍼트 머독 자신이 앞으로 3대 글로벌 미디어그룹이 등장할 것이고 그의 기업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주간지로서 독립언론의 대명사로는 독일의 <슈피겔>을 들 수 있다. 이 잡지는 발행부수도 100만 부에 이르지만 어떤 외압에도 굽히지 않는 완강한 논조로 유명하다. 1947년 창간 이래 2002년 사망 때까지 발행인·편집인을 겸한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은 서독의 허약한 국방력을 폭로했다가 반역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주간지인데도 무려 338명의 기자를 두고 있고, 방대한 자료와 꼼꼼한 취재에 근거한 심층기사로, 경쟁지인 <슈테른>은 물론 독일의 유수 일간지와도 경쟁한다. 뉴스룸과 기자의 독립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또 언론사의 소유자본이 독립적이라고 해서 언론 보도의 독립성이 반드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과 방송은 국영 또는 공영매체가 아닌 한 광고 수입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언론 보도의 독립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머독에게 인수된 뒤 뉴욕 타임스 인터넷판은 “미국의 전국지 중에서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만이 언론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집안이 지배주주로 있는 신문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2001년 워싱턴 포스트의 캐서린 그레이엄 명예회장이 사망했을 때 이 신문의 한 기자는 “그레이엄은 우리에게 단 한번도 무엇을 취재할지, 무엇을 쓸지, 누구를 찬양하고 누구를 비판할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편집국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자이퉁은 6명의 공동편집장을 두고 있다. 가디언과 르몽드 같은 곳에서는 주요 현안이 발생하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편집국 회의를 소집해 논조를 결정하기도 한다. 때문에 정치부와 경제부가 각각 다른 방향의 기사를 담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다. 가디언은 보도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편집회의에서 보도 방향을 미리 정하는 게 아니라 일선기자의 취재 내용을 토대로 방향을 결정한다. 편집국 간부의 기사가치 판단에 일방적으로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선기자의 자율성이 고양될 수 있다. 언론 환경이나 뉴스룸의 규범과 같은 외·내부 여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독립언론의 특성을 지켜내려는 기자 개개인의 각성과 노력이다. 독립언론에 소속된 언론인일수록 사실 보도와 의견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정파성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이 독립언론의 존재가치이기 때문이다. 과거 정파신문 시대에 기자들이 투쟁을 통해 발행인의 뜻을 사설란에 국한하고 객관 보도를 해온 전통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재벌그룹에 속한 언론사 기자들이 프로페셔널리즘을 표방하면서도 회사의 이익 창출에 민감하게 처신하고 체제순응적인 데 견주어, 독립언론사 기자들은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인습으로부터 탈피하려 애쓰고 언론인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독립언론은 한국 언론의 희망이지만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은 듯하다. 정권이 바뀌면 ‘친여 매체’ 소리를 듣는 언론사가 부각되고, 정부도 각종 언론정책을 통해 우호적 언론사를 지원하는 한국적 풍토는 독립언론의 성장에 해로울 수밖에 없다. 또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을 능가하는 경제권력으로 성장한 재벌이 정치·언론 환경을 좌우하는 상황은 국민에게도 시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희망의 등대가 불을 밝히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진로를 모색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