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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인종의 벽 넘은 오바마 어머니
- 이동현
- 조회 : 5433
- 등록일 : 2008-07-31
케냐 -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결혼-재혼
“피부색에 관계없이 인간은 동등” 강조
빈민 여성 삶에 관심 기울인 인류학자
인종편견이 여전했던 1960년대 초반 18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출신 흑인 유학생과 결혼한 백인 소녀, 그 뒤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과 재혼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인도네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긴 여인….
지금의 기준으로도 평범한 여성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동안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었던 미국 민주당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어머니 앤 더넘 소에토로 씨의 남다른 인생 스토리를 로이터통신이 11일 상세히 소개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보다 5살 위인 1942년에 태어난 더넘 씨의 어릴적 이름은 스탠리였다. 아들을 바랐던 아버지(오바마 의원의 외할아버지)가 남자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학교에서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중부 캔사스 중산층 가정의 백인 소녀로 자라났다. TV에서 동물이나 어린이가 학대받는 장면을 보면 눈물을 줄줄 흘리던 성격이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겁 없은 여성이기도 했다.
더넘 씨는 고교를 졸업할 즈음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사 갔다. 이사 가기 직전 첫 외국 영화를 봤는데 "흑인 오르페"라는, 브라질에서 촬영된 뮤지컬 영화였다.
오바마 의원은 훗날 자서전에서 "나중에 어머니는 나와 함께 그 영화를 다시 봤다"며 "소녀시절 어머니의 머릿속에 천진난만한 흑인 음악가의 이미지가 들어있었던 것 같다"고 썼다.
하와이대에 진학한 더넘 씨는 앤으로 이름을 바꿨다. 앤은 러시아어 수업에서 케냐 출신인 버락 오바마(오바마 상원의원의 아버지) 씨를 만난다. 당시 하와이대의 첫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으로 여겨지는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곳곳에서 연설 초청을 받고 지역 신문들이 인터뷰를 했다. 동료들은 "오바마(시니어)는 자석같이 주변을 빨아들이는 성격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웅변이 됐다"고 회상했다.
새침떼기였던 더넘 씨는 그해 가을 오바마 씨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는 흑인이 하와이 전체 인구의 1%도 안됐고 하와이를 제외한 다른 주에선 인종 간 결혼이 허용조차 되지 않던 시기였다.
만난지 몇 달 만인 1961년 2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당시 18세였던 더넘 씨는 임신 3개월째였다. 아무도 초청하지 않고 결혼식을 올린 더넘 씨는 한 학기 만에 학교를 중퇴했다.
오바마 의원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그의 아버지는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케냐로 돌아가 조국 부흥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케냐엔 이미 유학오기전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더넘 씨는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1964년 이혼소송을 냈다.
"흑인과의 사이에 아들을 둔 어린 이혼녀"라는 주변의 시선, 월세를 내기도 벅찬 생활속에서도 앤은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아들의 마음속에 분노를 심어주지 않도록 "항상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대학에 복학한 더넘 씨는 낙천적 성격의 롤로 소에토로라는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을 만나 1967년에 재혼했다. 그리고 새 남편을 따라 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사했다.
인도네시아 집은 자카르타 교외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뒷마당에 새끼 악어가 노니는 집에서 그 지역의 유일한 외국인 아이였던 오바마는 담위에 앉은채 두 팔을 날개처럼 퍼덕대며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곤했다.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고 곧 다들 친구가 됐다. 카톨릭 스쿨에서 아이들은 그를 "니그로"라고 불렀으나 오바마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고 당시 친구들은 회상했다.
오바마의 새 아버지는 미국계 석유회사에 다니며 승진해 좋은 동네로 집을 옮겼다. 미국대사관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은 오바마 의원의 어머니는 매일 오전 4시에 아들을 깨워 영어를 가르쳤다. 아들이 성장과정에서 흑인들과 어울리는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을 보상해주려 했던 그는 퇴근할 때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책을 가져와 건네주곤 했다.
오바마 의원은 "어머니는 피부색은 달라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고 같으며 모든 사람을 각각 독특한 개인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10살 때 하와이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보내 사립기숙학교에 진학케 했다. 당시로선 남다른 교육열이었다. 1년후 자신도 남편을 남겨둔채 하와이로 와서 대학원에 진학해 인도네시아 인류학을 공부했다. 1980년 이혼했지만 이번에도 위자료나 자녀 양육보조는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호놀롤루의 작은 아파트에서 학교에서 주는 학비 보조금으로 생활하던 더넘 씨는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당시 14살의 오바마는 어머니를 따라가기를 거부하고 외조부모 곁에 남았다.
어린시절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산 기억 때문에 오바마 의원은 "나는 내 아이들은 시카고에 뿌리내린채 안정감을 갖고 살게 하고 싶다"고 말해왔다.
더넘 씨는 인도네시아에서 영화인 음악인 노조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주변부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여권이나 인종 문제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으며 항상 긍정적 자세였다고 당시 동료들은 전했다.
1992년 인도네시아 소작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3년 뒤 자궁암으로 53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미 하와이에 돌아와 살고 있던 때였지만 오바마 의원은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로이터는 "어린 아들에게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강조한 어머니였던 동시에 아시아 빈민 여성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인류학자였다"고 그의 삶을 요약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다소 의외지만 이건 동아일보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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